아시아대양주 · 일본
호쿠사이 — 같은 후지산을 서른여섯 번 바라본다면
『후가쿠 삼십육경』에서 산보다 먼저 보이는 사람과 풍경

후지산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림에서 산은 생각보다 멀리 있다. 먼저 강과 사람, 가까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산을 크게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화가는 그 자리를 비워 두고 우리가 앞쪽을 지나 먼 곳까지 바라보게 한다.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후가쿠 삼십육경』은 같은 산을 거듭 다룬 판화 연작이다. 제목만 들으면 비슷한 그림을 여러 장 만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같은 대상이 얼마나 다른 장면을 만들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묶음에 가깝다.
01. 후지산은 같고 그림의 자리는 달라진다
연작에서는 산이 화면을 크게 차지하기도 하고 멀리 작게 놓이기도 한다. 사람들의 일과 길, 물과 날씨가 그 앞에 등장한다. 산의 형태가 익숙해질수록 오히려 그 주변에서 무엇이 달라지는지 더 잘 보인다. 하나의 산이 풍경을 비교하는 기준이 되는 셈이다.
여행 사진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는다. 같은 건물을 찍어도 어느 거리에서 어떤 시간에 바라보았는지에 따라 사진은 달라진다. 호쿠사이의 그림을 그저 경치를 복사한 결과로 보기보다, 무엇을 앞에 놓고 무엇을 뒤로 보낼지 고른 화면으로 보면 선택의 재미가 드러난다.
02. 다마강 너머에서 산을 찾기
함께 실은 작품은 다마강 너머의 후지산을 다룬 판화다. 여기서는 오래된 미술서에 수록된 도판으로 소개한다. 먼저 산을 찾고, 다음에는 앞쪽 풍경이 눈을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지 살펴보자. 먼 산에 닿기 전에 지나야 할 장면이 있다.
작품을 볼 때 앞과 뒤의 크기 차이도 중요하다. 가까운 요소가 크게 보이고 산은 멀리 물러난다. 실제 크기가 큰 산이 그림에서는 작아질 수 있다는 익숙한 원리를 화가는 화면의 리듬으로 바꾼다. 작은 산을 찾았을 때 그림 전체가 한 번 더 정리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03. 산만 그린 연작이 아닌 이유
이 그림들에는 후지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이 보이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도 들어간다. 자연을 바라보는 그림과 일상의 풍경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대상을 하나 정해 놓았기에 그 대상을 둘러싼 여러 장면을 비교할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판화를 당시 일본 생활의 정확한 사진처럼 읽을 수는 없다. 화가는 보고 싶은 관계를 강조하거나 화면을 정리할 수 있다. 그림 속에 무엇이 있는지 관찰하는 것과 그 장면이 현실에서 늘 똑같았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단계다. 감상과 역사 자료 읽기를 함께하되 섞지는 않는 편이 좋다.
04. 그림은 한 사람이 그려도 판화는 여러 손을 거친다
이 연작이 속한 목판화에서는 밑그림을 그리고 판을 새기고 종이에 찍는 과정이 이어진다. 오늘날 호쿠사이의 이름으로 작품을 기억하더라도 완성된 인쇄물에는 여러 작업의 숙련이 들어간다. 종이 위의 선이 또렷하려면 앞선 단계들도 맞물려야 한다.
같은 그림이 여러 장 존재할 수 있다는 점도 회화 한 점을 볼 때와 다르다. 인쇄와 보존의 상태에 따라 개별 도판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 여기 실은 옛 미술서의 재현 이미지는 화면 구성을 보는 자료로 활용하고, 원작의 색을 완벽하게 대신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05. 서른여섯이라는 이름에 갇히지 않기
연작은 흔히 서른여섯 장이라는 제목으로 기억되지만 추가 작품이 더해진 묶음으로도 알려져 있다. 제목이 실제로 유통되는 모든 구성의 수와 언제나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 하나를 볼 때에도 어느 묶음과 판본을 설명하는지 확인할 이유가 있다.
숫자를 먼저 외우면 연작의 재미를 놓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같은 산이 여러 시선의 중심이 된다는 발상이다. 한 장을 본 뒤 다른 한 장을 나란히 놓고 산의 위치와 앞쪽 풍경을 비교해 보자. 닮은 대상을 찾는 일에서 다른 구성을 발견하는 일로 감상이 바뀐다.
06. 유명한 한 장 밖으로 시선을 넓히기
호쿠사이라는 이름에서 거대한 파도 그림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유명한 한 장이 연작 전체의 분위기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마강 너머의 산을 보면 시선은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강렬한 장면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조용한 풍경을 새로 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잠시 기억을 내려놓아도 좋다.
연작을 만드는 발상은 독자에게도 비교할 자유를 준다. 어느 그림이 더 훌륭한지 순위를 정하기 전에 무엇을 다르게 선택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가까운 풍경이 많아졌는지, 멀리 있는 산이 더 두드러지는지, 사람이 화면의 중심인지 배경인지. 정답을 외우는 대신 화가의 선택을 하나씩 발견하는 감상이 된다.
07. 오래 그린 사람의 늦은 시선
호쿠사이는 긴 생애 동안 여러 작업을 이어 간 화가였다. 옛 미술서에는 나이가 든 뒤에도 더 잘 그리고 싶다는 뜻을 표현한 그의 말이 소개되어 있다. 그 전언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성공의 비결로 바꿀 필요는 없다. 다만 이미 오래 그린 사람도 관찰이 끝났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점은 남는다.
이 그림 앞에서 우리도 비슷한 작은 연습을 할 수 있다. 후지산을 찾고, 그 산을 잠시 잊은 채 앞쪽을 보고, 다시 산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림이 바뀐 것은 아닌데 보는 순서가 바뀌면 풍경이 새로워진다. 같은 산을 거듭 그릴 만한 이유가 조금 이해되기 시작한다.
이때 작가의 마음을 모두 알아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화면에서 실제로 보이는 선택을 살피고,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지 구분해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깊은 감상이 된다.
이야기의 바탕이 된 자료
- Arthur Davison Ficke, Chats on Japanese Prints — Hokusai 및 도판 49 ↗확인일 2026-11-01
다마강 너머 후지산 도판 49의 식별과 후가쿠 삼십육경 연작 · 산의 다양한 크기·위치·날씨, 본편과 추가 도판의 구성 · 호쿠사이의 긴 작업 생애와 노년의 발언 전언. 옛 저자의 가치 서열·출판 연대 추정은 채택하지 않음
- Chats on Japanese Prints — 목판화의 제작 과정 설명 ↗확인일 2026-11-01
그림·판각·인쇄의 협업, 도판 49의 작품명과 그림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