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ies · Europe
베네치아에서는 사자에게도 날개가 있다
날개와 책을 챙긴 사자가 도시의 얼굴이 된 사연

베네치아에서는 사자를 만날 준비를 조금 해야 한다. 동물원이 아니라 광장과 건물 벽에서 말이다. 기념품 가게까지 들어가면 사자를 피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런데 이 도시의 사자는 준비물이 많다. 등에 날개를 달았고, 앞발에는 책까지 챙겼다. 갈기만으로도 충분히 눈에 띌 텐데, 굳이 이 두 가지를 더했다.
왜 하필 날개와 책일까?
사자는 사실 누군가의 이름표였다
사연의 주인공은 성 마르코다. 그리스도교에서 마르코는 복음서 저자로 전해지는 인물이며, 날개 달린 사자는 그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옛 종교 그림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크게 써 붙이는 대신, 특정한 동물이나 물건으로 누구인지 알려주곤 했다. 마르코의 경우에는 사자가 그런 역할을 했다. 날개는 이 사자가 초원에서 사냥하는 보통 사자가 아니라, 종교적 상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조금 멀게 느껴진다면 이름표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림 속에 날개 달린 사자가 등장하면, 그리스도교의 상징에 익숙한 사람은 마르코를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시대의 모든 사자가 같은 뜻인 것은 아니다. 베네치아의 이 사자는 그 전통 안에 있다.
베네치아는 성 마르코를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모셨다. 산마르코 광장과 산마르코 대성당의 ‘마르코’도 같은 이름이다. 그러니 그의 상징인 사자가 도시의 얼굴이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성인을 가리키던 그림이, 베네치아에서는 도시와 옛 공화국을 가리키는 표지가 된 것이다. 성 마르코를 따라온 사자가 도시 전체의 간판까지 맡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책에는 무엇이 쓰여 있을까
날개보다 책이 더 궁금할 수도 있다. 사자는 책을 읽는 중일까, 아니면 중요한 내용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중일까?
펼쳐진 책에는 마르코에게 평화를 전하는 뜻의 라틴어 문구가 적힌 예가 있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공식 설명에서도 이 문구와 날개 달린 사자를 함께 소개한다. 단순히 박식한 사자를 만들려고 책을 보탠 것은 아니었다. 사자와 책이 함께 있어야 누구의 상징인지 더 분명해진다.
책까지 곁들이면 사자의 모습은 조금 달라진다. 힘센 동물에게 조용히 읽을거리를 건넨 듯 보이지만, 사실은 성인을 알아보게 하는 여러 표시가 함께 놓인 것이다. 옛 그림과 조각에서는 이런 물건 하나가 등장인물의 이름을 알려주기도 했다.
책에 글씨가 있다면 무엇이 적혔는지 살펴보아도 좋다. 다만 글자가 낡아 잘 보이지 않거나, 높이 있어 읽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럴 때는 가까이 다가가려 애쓰기보다 현장의 안내나 소장 기관의 설명을 찾아보면 된다.
그렇다고 감상이 복잡해질 필요는 없다. 책이 있는지, 날개는 어떤 모양인지, 표정은 어떤지만 보아도 사자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정답을 맞히는 대신 차이를 찾는 구경이다.
한 마리를 알아보면, 다음 사자가 보인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정면을 올려다보면 장식 사이에 자리 잡은 사자를 발견할 수 있다. 여러 아치 가운데 중심이 되는 부분 위쪽이다. 성인을 상징하는 사자가 그 성인을 모신 건물에서도 얼굴을 내밀고 있는 셈이다.
다른 사자들은 건물의 벽이나 장식 속에 들어가 있다. 어떤 것은 위엄 있게 앞을 보고, 어떤 것은 옆모습을 보여준다. 기념품 속으로 들어가면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다. 나라를 대표하던 상징이 손바닥만 한 물건이 되어 여행 가방에 실려 가기도 한다.
사자를 알아보는 데 익숙해지면 건물의 장식도 전과 다르게 보인다. 어떤 동물은 이야기를 나타내고, 어떤 동물은 특정 인물을 알려준다. 모양이 비슷해도 늘 같은 뜻은 아니니, 특별히 궁금한 조각은 그 건물의 설명과 함께 보는 편이 좋다.
이 정도만 알고 걸어도 여행의 풍경이 조금 달라진다. 방금 지나친 벽의 장식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게 된다. 글자를 읽지 못해도 작은 그림 하나가 도시의 이름을 알려주는 셈이다.
베네치아에 간다면 사자 한 마리쯤은 찾아보아도 좋겠다. 성당의 높은 곳에 있는 사자여도 좋고, 가게 진열장 속의 작은 사자여도 좋다. 날개와 책을 확인했다면, 마지막에는 얼굴을 한번 보자.
도시를 대표하는 일이 제법 근엄한 일인지, 아니면 기념품 가게 근무가 더 마음에 드는지. 그 표정만큼은 보는 사람이 조금 자유롭게 읽어도 괜찮다.
이야기의 바탕이 된 자료
- Basilica di San Marco — San Marco Evangelista ↗확인일 2026-10-27
성 마르코의 수호성인 지위와 날개 달린 사자·책의 도상 · 책에 쓰이는 평화의 문구; 전승과 신앙에 관한 서술은 역사 사실로 확장하지 않음
- Basilica di San Marco — La decorazione delle facciate ↗확인일 2026-10-27
대성당 정면 상부의 성 마르코 사자 장식